글쓴이 |
김재경 |
이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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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9 |
작성일 |
2024-08-17 오후 11:56:54 |
글제목 |
에어컨 필터를 청소하던 그때 그 시절 |
글내용 |
그걸 그때는 몰랐다. 끝날 듯 말 듯한 여름, 밤 산책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당연히 엄마도 빨래나 설거지보단 가만히 있는 게 좋고, 더운 걸 싫어한다. 그리고 깜빡하지만 않는다면 한 번에 한 번씩(?) 꼬박꼬박 물을 내린다…. 엄만 종종 내게 전화해 “딸램아 에어컨 필터 잘 청소해서 틀어야 돼” 한다. 약국 재고 확인의 그늘을 진작에 잃은 데다 여름은 해가 갈수록 맹렬해진다. 나는 고향도 여름도 빼앗겼다는 생각에 가끔 짜증이 난다. 그래도 세월이 내 부모 앞에 반짝이는 땅 하나를 남겨줬으니 회한은 참아진다. 내가 잠시 빌려 살았던 그 땅에서 그들이 창밖의 땡볕을 지루해할 생각을 하면, 늘 무언가를 무서워하며 살았던 젊은 내 부모가 떠올라 나는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현역가왕2 방청 하려고 대표 연임을 눈앞에 둔 이재명. 부산지역 최고득표율로 재선 의원이 된 국민의힘 김미애. 63년생, 69년생인 두 사람은 많은 부분 삶의 궤적이 겹친다. 학교 대신 공장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주경야독의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다녔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고, 정치인이 됐어요. DMZ 평화콘서트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 부모와 다섯 형제,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내야 했던 가난 속에서 중학교 진학을 접은 이재명은 1981년, 열여덟 살까지 고향 안동의 작은 공장들을 떠돌았다. 이재명이 대학 졸업과 함께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성취의 삶에 접어들기 시작한 1986년의 일이다. ‘소년공’의 삶 6년이 인간 이재명의 인생 서사를 좀더 극적으로 만드는 미장센의 성격이 짙다면 김미애의 그늘은 보다 실재적이다. 부산 방직공장 여공을 거쳐 장사도 해보고 쿠팡체험단 신청방법에 따라 초밥집도 해보고 하다 1997년 스물여덟 살 늦은 나이에 동아대 야간학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8년차 변호사 이재명이 성남에서 시민운동을 하며 한창 주가를 높여 가던 때다. 성남시장으로 있던 2015년 프레시안 인터뷰다. “구성원 모두가 n분의1로 결정 권한을 갖는 게 아니다. 다수는 무관심하고, 관심 있는 소수가 경합해 그중 센 쪽으로 권한이 이동하는 것이고,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했어요.“ 불법주차 신고 방법처럼 지지 않을 싸움만 골라서 하는 편이다.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은 승리를 많이 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지는 것도 습관이다.” 딸을 기반으로 도장깨기 하듯 당을 장악한 지금의 이재명을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요.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후 상도동에 다이소 재고확인 차 인사하러 갔다. YS의 ‘3당 합당’을 거부했던 노무현은 YS가 예전에 선물로 준 손목시계를 내보이며 “총재님(YS) 생각날 때는 꼭 차고 다녔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 결과는 노무현의 지지율 폭락이었다. 당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민주당은 DJ와 숙명의 라이벌인 YS에게 잘 보이려는 노무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여의도에서 이뤄지지만, 실질적인 정치공간은 다른 곳에 있어요고 느꼈다. 처방전 조회 과정에서 상도동 사저가 압류·매각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유족들은 사저만큼은 지키자며 2017년 YS 장남 은철 씨(지난 8월 7일 별세)의 아들인 김성민 씨의 명의로 매입했습니다. 당분간 상속 문제에 있어서는 동교동과 같은 사태가 불거질 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상도동 측이 YS 기념사업을 해왔던 과정을 되돌아보면 여전히 불안하다. 김영삼도서관은 서울 동작구가 건물을 기부채납 받아 남은 공사비를 부담하고, 주민개방형 공공도서관으로 만들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다. 대통령이 되자 사이렌24 실명등록 및 금융실명제 실시, 군내 사조직 하나회 해체 등 전광석화로 역사를 바꾸는 결단을 했습니다. 두 사저를 동시에 국가가 관리·보전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어요. 한국 민주화의 큰 산인 YS와 DJ의 사저가 국민통합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잡기 바라죠. 헨리 포드가 1925년 최초의 픽업트럭 ‘모델T 픽업 보디’를 선보인 이후 프로야구 중계는 미국을 상징하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서부 개척 시대 마차 짐칸에 텐트와 가재도구를 싣고 캘리포니아의 금광으로, 텍사스의 유정으로 향하던 프런티어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어요. 미국경제분석국은 픽업트럭 판매량으로 호·불황을 판단한다. 광활한 땅에 끝없이 뻗은 도로망. 1000㎞ 넘게 달려도 휴게소 하나 찾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는 미국에서 픽업트럭을 전기차로 만들어 파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 그때 엄마는 알뜰한 가정주부가 되기 위해 티슈 한 장도 조각내 세 번에 걸쳐 쓰기(모기 잡았다고 티슈 한장을 통째로 뽑는 날엔 바로 등짝 스매시), 집안의 온갖 전기 코드 뽑고 다니기(설령 하루에 10번도 넘게 쓰는 전자레인지라 할지라도), 퇴근한 남편 들어오기 전까진 거실 불 안 켜기(자녀 공부 시엔 예외) 등을 실천했는데, 이는 당시 그녀가 선보였던 여의도 열기구 예약 중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들이다. 아마도 세상살이가 좀 무서웠던 것 같다. 나는 그 공간이 집이 아니라 땅처럼 느껴졌었다. 곰팡이나 벌레 추위 더위 이런 것들이 큰 나무는 다 뽑아버린 지금의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키의 나무들이었다. 가을이면 늘 단풍 명소로 꼽히곤 했던 그 아름다운 숲길이 내 통학길이었다. 그 길엔 비가 내릴 땐 비가 안 오고 비가 그치면 비로소 잎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엄마는 처음엔 “너 대학 가면 방을 이렇게 저렇게 꾸며보자” 하다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엔 “취직하면 방에 무엇무엇이 필요할 거야” 했지만, 내가 취직하고 독립 자금을 모을 때까지도 새집은 지어지지 않아 나는 끝내 그 집에 못 살았다. 반짝이는 새 집에서 지금 내 부모는 아주 잘 지낸다. 아빠는 자주 술에 취하고 그 많은 날 중 정말 가끔씩만 길었던 기다림을 얕게 후회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지만 고향은 상실한 기분이다. 나는 “엄마 비 온다고 내내 창문 열어두지 말고 에어컨 한 시간이라도 틀어요. 습하면 힘들어” 한다. 이런 집에선 가만히 있으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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